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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당 배상명 박사의 친일행위
    카테고리 없음 2012. 3. 30. 10:51

     「역사에 남을 여성이 되자」

    쇼와19년도(서기 1944년)부터 징병령이 조선에도 실시되게 된 것은 반도민중의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아직까지 지원병에 부치던 반도인에게 이제는 떳떳한 제국의 군인으로서 국의 중책을 지게된 것은 크나큰 광영이며 더구나 반도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우선 교육자인 입장에서 반도의 여성을 어떻게 교육하며 더구나 군인의 아내요 어머니인 중책을 담당하여 나갈 군국 여성을 연성하는데 종래보다 더한중 결의를 새로이 하며 교양과 지식을 길러나가자 다시 한 번 느끼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먼저 내지(일본) 여성들의 본을 받아 역사에 남은 군인의 어머니, 유명한 군인의 아내뿐만 아니라 군인의 가족의 가정훈(家庭訓)을 배워 반도에서도 그런 위대한 여성들을 배출해 나가는데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이 일체가 되어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이와 같이 군국의 여성이 되려면 육체의 건강에 힘쓸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정신의 건강, 즉 일본정신의 입장과 강하고 위대한 필승불패의 신념이 강한 정신력을 함양하여야 될 것입니다.

    계당 배상명 상명여학교(現 상명대학교) 교장, 매일신보 1942.5.13.

    일제 강점기 말기에 상명여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신교육을 받은 여성 교육자들을 동원한 전쟁 지원 작업에 참여했다. 1941년 9월 전위여성격려대가 결성되었을 때 가담하여 황해도 해주, 사리원, 안악군 지역에 파견되었고, 강연회와 좌담회를 통해 여성들의 전쟁 지원을 촉구했다.

    1943년 5월에는 친일잡지인 《조광》이 주최하는 좌담회에 참석하여 징병제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발언을 한 것을 비롯, 징병제를 찬양하는 담화를 발표한 바 있고, 조선임전보국단의 부인대 지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2년 5월 13일 《매일신보》에 실은 〈역사에 남을 여성이 되자〉라는 글에서는, 징병령의 조선 적용이 "반도민중의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며 "반도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적으면서 일본정신에 입각한 군국의 여성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생략)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들어 있다.

    위키백과 '배상명' 항목 中

    학교 이름 상명은 설립자인 배상명의 이름을 딴 것인데, 문제는 배상명에게 친일 행적이 남아있다는 것.

    • 첫번째로 창씨 개명에 앞장서서 이름을 바꿔버린 덕분에 일본식 이름이 있고,
    • 두번째로 위안부단체가 만들어졌을때 가담해서 북한의 여러 지역에 파견되었으며,
    • 세번째로 각종 좌담회나 강연 등을 통해 여성들의 전쟁 지원을 촉구했다.

    이후 조선인들을 일본군에 징집한다는 명령이 떨어지자 "반도민중의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며 "반도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적으면서 일본정신에 입각한 군국의 여성이 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친일행적에도 불구하고 64년 문화훈장, 8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는데 참으로 통탄할 노릇. 게다가 이런 인물을 기념한답시고 교내에 계당홀이라는 건물을 세우고 좌상을 만들어 두었다. 이 계당홀은 평소에는 봉인(...)되어있다가 외부에 방송전파를 탈 일이 있거나, 외부 손님돈을 꼬박꼬박 갖다바칠 신입생들이 몰려올 일이 생기면 봉인을 해제한다. 11년 1월 전국 노래자랑 종로구청편을 상명대학교 계당홀에서 녹화했다(...)

    무엇보다도 최강의 병크는 친일인명사전 내에 등재되자, 상명대측에서 배상명을 제외하려고 직접 항의했다는 것. 이때문인지 몇몇 재학생들은 스스로 친일파가 세운 학교에 다닌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다.

    엔하위키 '상명대학교' 항목 中

    지금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말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상명대에서는 배상명 선생의 이러한 친일내역에 대한 설명은 일언반구도 없다. 오히려 1년에 한 번씩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으며, 엔하위키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자 학교에서 항의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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